엊그제 내가 잠자는 사이에 마눌님의 한 편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 청탁자는 큰 애의 담임선생님.(ㅡㅡ;;)
교육청인가 어디에 올리는 글인데 학부모가 써서 내는 게 있어요. A4 한두 장 분량이니까 간단합니다. 희망을 주제로 아무 글이나 괜찮아요. 아, 사진하구요.
뭐 이런 내용의 청탁이었단다. 울 마눌님의 기억력도 나와 비슷해서리.
어쨌든 난감한 일이다. 마눌님께서 덜컥 받아들인 상태니 이제와 거절할 수도 없다. 시간도 촉박하다. 내일까지 보내달란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일전에 써두었던 <선생과 학부모>의 포스팅을 좀 순화시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문을 읽은 마눌님께서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왕따당하게 만들 일 있냐"구 으름장을 놓아 포기.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짧은 꽁트였다. ㅡㅡ;;
뭐 에세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퇴짜맞으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안 되는 필력으로 두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 그 성과물은 ㅡㅡ;; 다음과 같다.
읽으실 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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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바이러스.
1. 희망 바이러스
그 날도 조간신문은 여전히 불쾌지수 높고 습도 가득 찬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오천 원을 빼앗기 위해 친구를 폭행한 중학생, 같은 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한 고등학생, 왕따를 당해 자살한 대학생, 학교 짱을 가리기 위해 패싸움을 벌인 교사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내왔다고 흥분하여 가게 벽에다 술병을 내던지며 행패를 부린 국회의원, 국민들의 눈을 피해 해외의 땅을 사려다가 사기당한 정치인들.
구성원(丘成元) 씨는 한숨을 쉬며 읽던 신문을 덮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는 벌써 사흘 동안 그를 괴롭히고 있는 변비와도 같았다. 구성원 씨는 결국 그 날도 성공하지 못한 채 변기의 물을 내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구성원 씨의 직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특히 해킹과 바이러스 제작에 일가견이 있어서 사이버수사대는 물론 정계나 대기업에서까지 의뢰가 들어왔고, 대부분 라이벌 정치가나 대기업의 홈페이지에 바이러스를 심어달라는 요구였다. 구성원 씨는 프로였다. 썩 내키지 않는 일들이었지만 한 번 의뢰를 받아들인 이상 철저하게 해킹하고 바이러스를 심었다. 한 때 전국이 떠들썩했던 밀레니엄 바이러스도 다름 아닌 구성원 씨의 작품이었다.
벌써 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밀레니엄 바이러스는 핵폭풍과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모든 전산 시스템이 마비되고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인천공항에서는 관제 시스템이 고장을 일으켜 비행기들이 충돌하고 불시착을 했으며, 은행에서는 전산 오류로 인해 수백억 원 대의 예금이 엉뚱한 사람의 계좌로 빠져나갔다. 정부의 업무도 마비가 되었고 전자통신도 두절되었으며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극도의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당시 구성원 씨는 밀레니엄 바이러스를 만들어 전국의 통신망을 마비시킨 후, 미리 준비해둔 백신 프로그램을 의뢰인에게 건넸다. 의뢰인은 그 백신 프로그램으로 무정부 상태의 공황과 혼란과 빠진 나라를 구했다. 세기말적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덕분에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된 의뢰인은 구성원 씨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구성원 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디까지나 구성원 씨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였으니까.
아랫배를 묵직하게 만드는 변비와 화장실에서 읽었던 불쾌한 신문 기사의 여파로 인해, 컴퓨터를 부팅하는 구성원 씨의 얼굴은 여름 장마철의 우중충한 하늘과도 같았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구성원 씨는 마우스를 클릭하여 어제 온 메일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룻밤사이에 스물 두 건의 의뢰건수가 들어와 있었다. 구성원 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나씩 메일을 열어 의뢰 내용을 살폈다. 여전히 해킹과 바이러스에 관한 의뢰가 대부분이었다. 열두 번째의 메일을 클릭하여 의뢰인을 확인한 순간 구성원 씨는 얼마나 놀랐는지, 담뱃재가 키보드 위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초등학생이 바이러스 제작을 의뢰해온 것이었다.
‘이런 젠장.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초딩들까지 벌써 바이러스를 의뢰해 와?’
구성원 씨는 혀를 찼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키보드 위의 담뱃재를 재떨이로 옮긴 후 그는 초등학생이 보내온 메일의 전문을 읽어 내려갔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 둔 후 너무 힘이 없어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해요. 우리랑 놀아주지도 않아요. 또 얼마나 담배를 피우는지 아빠 방에만 들어가면 나쁜 냄새가 나요. 담배는 나쁜 거라고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우리 아빠는 나쁜 담배를 쉬지 않고 피워요.(이 부분에서 구성원 씨는 제 풀에 놀라 얼른 담배를 껐다. 구성원 씨도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아빠가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담배도 끊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예전처럼 웃으면서 우리랑 놀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저씨. 아빠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바이러스를 만들어 주세요.
오천 메소를 함께 보내요. 부탁드립니다. 솔개 초등학교 1학년 3반 유호철.>
메소는 초등학생들이 즐겨 한다는 온라인게임 내에서 통용되는 화폐단위였다. 게다가 힘과 희망을 주는 바이러스라니. 정말 초딩다운 행동이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성원 씨는 웃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메일을 또 읽고 읽었다. 이윽고 한 개비만 피운 담뱃갑을 통째로 구겨 휴지통에 버린 그는 작업에 들어갔다. 저 초딩의 부탁대로 힘과 희망을 주는 바이러스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구성원 씨는 예전 밀레니엄 바이러스를 만들었을 때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꼬박 작업에 몰두한 그는 유호철 학생의 메일로 새로 만든 바이러스를 침투시켰다. 곧 바로 유호철 아버지의 컴퓨터는 바이러스에 점령당했다. 부팅을 하면 새파란 화면을 꽃과 풍선이 가득 메우고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노래가 귀여운 아이들의 플래시와 함께 반복되었다.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아이를 불렀다.
“호철아! 아빠랑 인라인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으련?”
구성원 씨의 바이러스는 게서 멈추지 않았다. 유호철 아버지의 컴퓨터를 장악한 바이러스는 하드에 내장되어 있는 msn, 버디 등의 주소를 따라 다른 이들의 컴퓨터로 전염되는 방식으로 무한확장을 시작했다. 전국의 컴퓨터가 모두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는데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백신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안칠수연구소의 컴퓨터들도 모두 이 바이러스에 걸렸다. 부팅하면 가을하늘처럼 새파란 화면이 켜지며 바이러스가 걸렸다는 걸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바이러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때 그때 달랐다. 구성원 씨의 바이러스에는 컴퓨터 사용자가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올린 글의 패턴과 감정을 분석하는 로직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분석에 따라 메시지를 다르게 전달하였다. 실직하거나 아직 백수인 자에게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라는, 애인과 이별하여 슬퍼하는 자에게는 “이별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만남이 있는 거야.”라는, 왕따로 인해 자살을 생각하는 자에게는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늘 함께 있어.”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바이러스에 걸린 모니터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차츰 밝아졌다. 입가에 웃음도 새겨졌다.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걸려서 행복해졌고 희망을 얻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바이러스를 희망 바이러스라 불렀다. 희망을 주는 바이러스. 희망을 전파하는 바이러스.
희망 바이러스는 돌고 돌아 마침내 구성원 씨의 컴퓨터까지 장악했다. 구성원 씨는 희망 바이러스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모 개그맨의 플래시가 뜨면서 “변비? 그까잇 거 단숨에 뻥!”하는 메시지가 뜬 것이다. 구성원 씨는 한참 웃다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희망 바이러스를 만든 지 보름 만에 구성원 씨는 마침내 큰일을 성공할 수 있었다.
2. 글을 마치며
늘 아이들에게 올바르고 정직하게 자라야한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크기를 기원한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제대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라는 걸, 올바르고 정직한 자들이 꿋꿋하게 버티기 힘든 사회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부모가 “영악하게 커라, 남의 뒤통수를 치며 자라라. 부동산 투기하는 걸 배워라.”하는 식으로 가르칠까.
제대로 된 세상을,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인정받는 그런 세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게 내 희망이고 내가 전하는 희망 바이러스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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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2/저것만으로도 청탁자가 원했던 분량을 초과해서 말입니다. ㅡㅡ;;
재밌게 봤습니다. (프로가 이런 글을 보내면 반칙같지 않습니까?)